얕은 바다/그깟 공놀이

[야구] 나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야구 연대기, 제 1부

1988

나는 '세계사적인 의의가 있다고들 하' 서울 하계올림픽이 열렸던 1988, 경기도 화성에서 충청남도 태안 출신의 어머니와 강원도 평창 출신의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 올림픽에서 야구는 아직 시범종목이었고, 이 해의 한국프로야구 우승팀은 그 때 그 시절 거의 언제나 그랬듯이 김응룡 감독선동열해태 타이거즈였으며, 미국 메이저리그 우승팀은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9회말 2아웃 커크 깁슨의 역전 투런 끝내기홈런으로 승리를 따낸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였다. 참고로 커크 깁슨은 올해 다저스와 유독 물리적 충돌이 많아서 적대적인 라이벌로 새롭게 부상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감독이다. 물론 내가 이런 것들을 직접 봐서 아는 건 당연히 아니고, 본격적인 야구 팬이 된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이후로 하나 둘 씩 알게 된 것이다. 고로 이런 역사적인사건들은, 남들에 비해 유난히 말을 일찍 시작한 대신 남들에 비해 유난히 걸음마를 늦게 뗀, 한 살짜리의 나와 그 어떠한 연관성이 있을 리가 전혀 없었다.

그 때 화성에서 어떤 일이 한창 일어나고 있었는지는 따로 특별히 언급하지 않겠다.

지금도 구글에서 Kirk Gibson을 치면 죄다 이 홈런에 관련된 사진 위주로 뜬다.


1994

경기도 광명의 연립주택가달동네에서 살았다. 이 전까지는 미술학원에 다녔는데, 학교 입학을 1년 앞두고 이 한 해에만 유치원에 다녔다. 매사가 귀찮은 선생님들이 전통놀이랍시고 그림만 보여주고 직접 같이 해보는 시간은 주지 않아서, 놀이터에서 노는 시간에 내 스스로 자치기를 해보았다. 내가 쳐서 날린 막대기에 한 아이가 맞았고, 울음을 터트렸다.당연히 선생님께 혼이 났고(근데 그러고보니 내가 일부러 맞춘 것도 아닌데) 나는 다시는 자치기를 할 수 없었다. 여담이지만, 미취학 아동들이 유치원 대신 미술학원에 다닌다는 것의 의미와, 미술학원이 유치원과 갖는 차이는 그 때는 당연히 알 턱이 없었지만 20년 쯤 지나고 나니까 비로소 조금씩 알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선생님들의 자질이나 기타 여러가지 면에서 그 미술학원이 그 유치원보다 훨씬 나았다.

앞집에 사는 한 살 위 국민학교 1학년 형이 테니스공을 가지고 야구를 가르쳐줬다. 타자가 친 공을 주워서 달리는 타자의 몸에 맞추면 아웃이라고 했다. 19세기 야구 ㄷㄷ 그래서 정말 그 형한테서 배운 그대로, 형이 친 공을 주워서 이미 2루를 찍고 3루로 내달리는 그 형의 머리를 정통으로 맞췄다. 그래서 그 형도 울음을 터트렸다. 3학년인 그 형네 형이 나와서 상황을 정리했다. 그 뒤로 나는 다시는 동네 골목에서 야구를 하지 않았다.

, 그리고 야구선수 딱지 같은 걸 조금 모은 기억도 난다. 당시로서 아직은 나오지 않았던 오리온 과자 속 따조랑 비슷하게 생긴 모양이었다는 것 정도만 기억나는데, 그나마 한 가지 또렷한 것은 내가 해태 타이거즈 이종범 선수 딱지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략 이런거 였다. 사진 속 물건은 90년대보단 80년대의 팬들에게 더 친숙한 물건인 듯 하다. 자료 출처는 딴지일보.


1995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뀐 것은 그 다음 해, 내가 2학년 올라갈 때였다. 왠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아빠를 따라서 LG 트윈스를 응원했고, 충청도 출신 엄마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빙그레 한화 이글스도 좋아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지금까지 평생 단 한 번도 경기장에 가서 LG 응원석에서 경기를 관람한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그 전 해에 회사를 관두신 엄마의 큰 도움을 받아, 여름방학 숙제로 야구 신문기사 스크랩북을 만들었다. 지극히 단편적인 기억들만 조금조금 남아있을 뿐이지만, 당시 우승팀 OB 베어스박철순, 준우승팀 롯데 자이언츠박정태, 해태의 선동열과 이종범, 꼴찌팀 쌍방울 레이더스김기태 선수 등에 대한 기사들이 있었다는 게 떠오른다. 타율이니 방어율이니 하는 선수 순위표 따위도 오려서 붙였던 것도 기억한다. 그런데 엄마가 그렇게 가르쳐주셨던 건지, 난 그때도 박철순이 여전히 현역 최고의 투수인줄 알았다. 그나저나 그 스크랩북, 진심으로 다시 보고 싶다. 지금 와서 보면 굉장히 재밌을 것 같다. 그게 지금도 집 안방 장롱 위 어디엔가 남아있다면 정말 좋으련만......

 

1996

95년도 가을, 인천 연고의 태평양 돌핀스가 최대 재벌 현대그룹에게 인수되어 현대 유니콘스로 거듭난다는 소식을 접했다. 신문 지상에서 김재박 감독 이하 선수단의 정장 입은 개인별 사진들과 함께 이 사실을 전하는 광고도 봤다. LG 열성팬이었던 반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자 그 친구는 대뜸 "올~ 현대 잘하겠는데?"라고 답했다. 대단한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전화 지역번호도 02를 쓰는 구로구 멀티 광명의 지리적 특성상 인천과 우리 집은 아무런 접점이 없었으나, 현대의 창업주 정주영 회장이 강원도 출신이므로 현대는 강원도 기업이고, 고로 이제부터 우리 가족은 현대를 응원해야 한다는,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세상에나 어처구니가 없는 발상인데, 어쨌든 그런 아빠의 방침 때문에 타의에 의해서 현대 팬이 되었다. 솔직히 여덟 살 짜리가 LG가 어떤지 현대가 어떤지 그리고 야구가 뭔지 대체 뭘 알았겠어? 그리고 사실 어쩌면 이 때 현대 팬이 된 것이 내 인생 최대 실수 중에 하나이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이건 나중에 따로. 음 그리고 이건 야구 얘기는 아닌데, 이로 인해서 모든 스포츠에서 현대를 응원해야 하는 줄로만 알았던 나는, 그래서 그 다음 해인 97년에 프로농구가 출범했던 날에 대전 현대 다이냇의 팬이 될 것임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선포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아빠는 바로 나를 원주 나래 블루버드의 팬으로 만드셨다. 이 팀 응원하라고 누가 시키면 그냥 팬이 되는거다. 아홉 살 짜리가 뭘 알았겠어? 현대고 나발이고, 사실 강원도 연고팀이 있다면 거기가 최우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아이러니하게도, 국내외를 통틀어서 모든 프로 스포츠 중에서 적어도 농구에 관한 한 나는 지금까지 한 팀의 팬심을 흔들리지 않고 쭉 지키고 있다. 아마 거의 유일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17년 째 원주 팬이다.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그 해는 나의 선천적인 운동신경 부족과 학교의 불량한 친구들을 염려한 엄마가 날 합기도장에 보내기 시작하신 해이기도 했다. 1년 전에 개업한 엄마의 옷가게 바로 맞은 편에 합기도장이 새로 개원했기에 나를 그 곳으로 보내신 것이었다. 강원도 태백 출신이라는 관장님은 엄청난 야구광이면서 해태의 팬이셨다. 놀랍게도 현대는 인수 첫 해에 바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는데, 마침 상대가 최고 명문이자 당대 최강 해태. 결국에 현대는 졌지만 4차전에서 투수 정명원이 달성한 노히트노런은 해태 팬인 관장님과 현대 팬인 나를 모두 전율케 한 놀라운 사건이었다. 지금도 난 다음 날 중앙일보 스포츠면에 굵은 글씨로 박힌 헤드라인과 정명원의 사진이 기억난다. 이 해에 현대의 신인 외야수 박재홍이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 30-30을 기록하는 초유의 사건도 있었는데, 내 개인적으로는 정명원의 노히트노런 뉴스가 더 기억에 또렷하다.


나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야구 연대기, 제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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