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바다

힐링

'힐링'이란 말을 굉장히 경멸해왔다. 예전에 전역하신 초등학교 교사 장교 선배는 "게임에서 힐링이란건 '피'가 많이 닳았을때 보충해주는건데, 요즘 사람들이 자꾸 힐링 힐링 찾는다는건 그만큼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나봐..."라고 하셨다. 난 그 비유가 기막히게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데나 힐링 힐링 갖다 붙이는 세태가 마음에 안 들었다. 힐링 그 자체는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다시 게임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내 피(에너지)가 닳는건 몹이 나를 때리고 있기 때문인데 그 몹을 먼저 때려 죽이지 않는 이상 힐링을 해봤자 내 피는 다시 닳게 마련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갉아먹는 몹을 잡아 족치지 않는 이상 우리의 피는 계속 닳을 것이고, 그런만큼 힐링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할 것이다. 매스미디어가 떠드는 힐링의 실체는 결국 무한한 소비로 이끄는 자본의 선동이고, 그 선동은 능동적이지 못한 우리의 욕망으로 하여금 문제의 근원을 전혀 건드리지 못하는, 결과적으로 무의미한 소비만을 반복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3주 남짓 동안 하루 평균 세시간 정도 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일과시간 중에는 스마트폰 한번 쳐다보기도 힘들게 끊임없이 각종 문서작업을 했고, 당직 오프한 날을 제외하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최소 11시까지 야근을 했고, 주말에도 출근했고, 낮에도 밤에도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여러가지 전화와 씨름했고 그 속에 녹아있는 갑질과 꼽질에 시달려왔다. 잠깐 단 하루만이라도, 딱 하루만이라도, 출근 생각하지 않고 알람 없이 늦게까지 푹 자고, "너는 18특기 장교가 돼가지고 그것도 몰라?" 따위 대령님들 중령님들의 메마른 목소리 대신 김윤아누나 크리스마틴형의 나긋한 목소리를 듣고 싶고, 공육군 합동기지방어훈련 계획 짜는 대신 리투아니아 여행계획을 짜고 싶고, 적 항공기 기지 위협분석과 당직사관 근무지침서를 쓰는 대신 내 블로그에 여행기와 배구리그 평론을 쓰고 싶고, 보수해야 될 전투진지 사진 말고 날아가는 겨울철새들 사진을 찍고 싶고, 예방감찰 결과 하달문서는 그만 보고 세계테마기행을 보고 싶어졌다. 이쯤 되니 이미 내 마음 속에는 '힐링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고, 어쩌면 이번 주말도 반납하고 출근하는게 맞지않을까 고민하던 차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영등포행 무궁화호를 타고야 말았던 것이다. 나는 오늘밤 세상 그 어디보다 잠이 잘 오는 내 방 내 침대에서 무한정 잠을 청할 것이고, 내일은 욕조에 따뜻한 물 받아놓고 반신욕하면서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 듣고, 탁재형 PD님의 여행기를 읽으며, 엄마가 끓여주실 감자탕을 먹고, 한창 정주행하고 있는 더 지니어스 세번째 시즌을 마저 볼테다. 따지고 보자면, 내가 지금 내 삶을 괴롭히는 근본적인 문제를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없다. 지나가는 사람한테 유리병이라도 집어던지고 끌려가거나 하지 않는 이상. 이럴때 힐링이란 말을 쓰는거구나... 라고 비로소 절실히 이해가 되는 것이다. 지금 딱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제발 나를 찾는 전화와 카톡이 그 어디에서도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일모레까지 딱 이틀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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